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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 스니커즈,운동화,구두,워커,슬리퍼




신발
⇒ 신 .
설명
발을 보호하고 모양새를 갖추기 위하여 신는 물건의 총칭. 새끼를 꼬아 날을 삼고 총과 돌기총으로 삼은 것은 짚신, 통나무를 파서 발이 들어가도록 하고 매무시를 낸 다음 앞·뒤에 높은 굽을 달아서 진 땅에서 신도록 한 것은 나막신, 가죽으로 지어서 발만 들어가도록 한 것은 구두, 발 전체를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은 장화라고한다. 이러한 신은 그 종류에 따라 재료가 다르지만, 대체적으로는 가죽·짚·목재·직물·고무·합성수지 등이 사용되며, 단독재료를 사용해서 만드는 것과 몇 가지 종류의 재료를 사용해서 만드는 것이 있다.

서양
서양식 신은 구두류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구두·샌들·슬리퍼 등 개별적 명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구두류는 단화나 장화처럼 발부분을 덮고 싸는 폐쇄적인 신과 샌들이나 슬리퍼와 같은 발바닥 보호를 주로 하는 개방적인 신으로 크게 나뉜다. 엄밀한 의미에서 슬리퍼는 구두에 포함되지 않는다. 기후나 풍토에 따라서 모양과 소재에서 특징을 볼 수 있으며, 따뜻한 지방에서는 개방적인 신이 생겨나고 추운 지방에서는 폐쇄적인 신이 생겨났다고 생각된다. 신의 주된 목적은, 황무지나 한지(寒地)·열사지(熱沙地) 등에서 보행할 때에 발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또한 장식이나 신분의 표시 등도 중요한 역할이었다. 현대의 폐쇄적인 구두류는 발가락을 압박하는 형태인 것이 많으며, 발가락의 변형을 초래하기 쉽다. 중년부인에게서 볼 수 있는 외반(外反)엄지발가락은 그 예이다. 개방적인 신은 족근(足筋)의 발달에는 좋지만 보행능률은 조금 떨어진다. 고대 이집트에는 개방적 신의 원형인 샌들이 있었다. 파피루스나 종려나무를 엮은 것이나, 가죽이나 나무를 바닥에 대고, 긴 앞끝을 발목에 있는 등자처럼 생긴 끈에 연결해서 발에 고정시키고 신었다. 신왕국시대에는 염색한 가죽으로 정성껏 만들고 보석이나 금세공으로 장식한 것도 등장하였다.



샌들을 신는 것은 신관·왕·귀족 등에게 허용되었던 특권이었지만, 자기보다 고위자 앞에서는 벗었으며 성역에서는 신지 않았다. 이것은 고대 오리엔트에 널리 퍼졌던 습속이었던 것 같다. 초기왕조시대에 샌들은 의식이나 알현(謁見) 등 필요한 때에만 신었고, 목적지까지는 시종자에게 들고가도록 하는 등 소중하게 다루었던 것 같다. 한편,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기후 때문인지 가죽이나 모피로 만든 구두나 반장화가 많다. 또한 발뒤꿈치를 덮는 형태의 샌들도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신은 가죽으로 만든 개방적인 샌들였지만 장딴지를 길게 짜올려 지은 장화인 버스킨(buskin)도 있었다. 여성용도 여러가지 색깔이 있으며, 자수나 금으로 장식되었다. 바닥이 두꺼운 코토르노스(Kothornos)는 비극배우가 무대에서 키를 크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신었다. 노예는 역시 맨발이었다. 조금 늦게 폐쇄적인 신의 한 원형인 모카신형(mocasin型)의 신(한 장의 가죽을 오무려서 발을 싸는 형식으로 된 것)이 어떤 종류의 노동용으로서 등장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기본적으로는 고대 로마로 답습되었지만, 다양해지고 동방이나 북방민족의 영향으로 폐쇄적인 신도 많아졌다. 칼케우스(calceus)와 캄파구스(campagus) 등이 그것이다.



이 무렵 북유럽 사람들은, 모카신형신을 주로 신었으며 바닥에 나무를 댄 무두질하지 않은 가죽이나 모피의 부츠, 단순한 가죽끈이 달린 샌들 등을 신었다. 이러한 것들은 중세로 계승되어 발전했으며 오늘날의 신의 기본형이 되었다. 중세에 제화는 전문화되었는데, 12, 13세기에는 각지에 구두조합이 생겼다. 비잔틴시대에는 상류층 사람들이 깨끗하게 염색한 가죽이나 견직물에 금실이나 진주로 수놓은 호화스러운 것을 신었는데 앞부리가 조금 뾰족하였다.
 


14, 15세기 고딕기에는 복식의 예각적(銳角的)인 특징과 함께 이 뾰족한 앞부리가 극단적으로 되었으며, 남성용 신의 부리 끝에는 모양을 유지하기 위하여 속을 채워넣었고, 쇠사슬로 무릎이나 신 상단에 붙이는 것도 나타났으며, 각지에서 규제령이 가끔 나오기도 했다. 이를테면, 영국의 에드워드 3세(1327∼77)는 <발부리가 2㎝ 이상 긴 구두나 부츠를 신은 사람은 40펜스의 벌금을 과한다>고 금령을 내렸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으며, 18인치(약 45㎝) 이상인 것까지 등장하였다. 부리가 긴 이 신은 폴란드로부터 전해졌다고 하며, 풀렌(poulaine) 또는 크라코(crakow)라고 불렸다. 당시에는 바이어스식으로 된 긴 양말을 신었는데, 바닥에 가죽이 붙은 것도 있었다. 중세의 길은 나쁘고 질퍽거렸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나 외출할 때에는 나무로 만든 샌들형 파텐(patten)을 신에 겹쳐서 신었다. 농민용으로는 버드나무나 너도밤나무를 파내어서 만든 사보(sabot)나 클로그(clog)가 있는데,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16세기 르네상스시대가 되자 복식에 보조를 맞추어서 구두는 각형편평(角型偏平)하게 되었다. 여자에게는 동방이 기원이라고 하는 나무의 돈대(墩臺)가 붙은 초핀(chopin)이 키가 크고 멋있게 보이도록 이용되었다. 16세기 말에는 구두가 거의 오늘날의 것과 같은 모양으로 정착되었는데 굽이 낮은 하이힐이 등장하여 17, 18세기에는 전성기가 되었으며 루이힐(밑둥이 굵고, 끝이 가는 힐, 뒷부분이 앞쪽으로, 앞부분이 밑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등이 정형이 되었다.



빨간 힐은 궁정인의 것이었다. 17세기 전반, 기사풍의 유행과 함께 신의 입구가 크게 뒤집힌 부츠가 유행하였다. 프랑스혁명 때에는, 나막신이 판탈롱과 함께 혁명파의 상징적 복장이 되었다. 19세기에는 복식의 유행이 눈부시게 변화한 때인데, 복식에 맞추어서 부츠와 단화를 가려서 신고 다녔다. 한편 고무나 도크(doek) 등의 신소재의 이용과 제화용 재봉틀의 발명으로, 구두의 기계제조가 가능하게 되었는데, 특히 미국에서는 기성화를 추진하였으며, 20세기에는 더욱 발전해서 각국으로 전해졌다. 스포츠의 성행으로 각종 스포츠화가 등장하고 개량되어서 풍부해졌다. 제1차세계대전 뒤 스커트의 길이가 짧아짐과 동시에 신은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920년대에는 살색비단으로 만든 장화가 보급되었고, 제2차세계대전 뒤에는 다시 얇은 감의 나일론장화가 그것을 대신하였다. 1920년대에 남자구두는 낮은 힐의 현대형 단화가 되었다. 합성수지나 합성피혁, 성능이 좋은 접착제의 발달로 대량생산이 한층 진척되었다. 1960년대에는 미니스커트의 유행과 함께 여성의 긴 부츠가 등장하였다.

한국
한국 상고시대의 신을 그 형태상으로 보면, 화(靴)와 이(履)로 나눌 수 있는데, <이>에 신목이 붙은 지금의 장화 같은 긴 신을 말한다. <이>는 신목이 짧은 신의 총칭으로서 혜(鞋)·비(扉)·극·구·석·갹답 등을 포괄한다. 화는 북방계통에서 유래된 신이고, 이는 남방계통의 신이며, 의생활 측면에서 볼 때, 신은 기본복식과 함께 성장(盛裝)에 없어서는 안될 족의(足衣)로서 의생활의 독립된 분야로 독특하게 발전해 왔다.

신의 종류
신은 성별·신분·복식·직업·재료·형태에따라 다양하며, <화>와 <혜>를 중심으로, 재료에 따라 구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피혁제(皮革製) 신
흑피화·협금화·수화자·목화·기자화·사피화·동화·백화·단화 등이 <화>에 속하고, 흑피혜·분투혜·투혜·사피혜·피초혜·당혜·운혜·발막신·징신 등이 <혜>에 속한다.

초마제(草麻製) 신
짚신[草履(초리)]에는 왕골짚신·부들짚신·고은짚신·엄짚신 등이 있고, 미투리[麻履(마리)]에는 삼신·절치·탑골치·무리바닥·지총미투리 등이 있었다.

포백제(布帛製) 신
사(紗)·나(羅)·능(綾)·단(緞)을 재료로 해서 만든 당혜·운혜·태사혜 등이 있다.

유제(鍮製) 신
놋으로 만들어서 <유혜> 또는 <놋신>이라고 하며, 특수층에서 비올 때 신었다.

지제(紙製) 신
종이로 만든 신으로서 지혜(紙鞋)라고 했으며 천한 사람들이 신었는데, 지총미투리는 그 중 고급품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목제(木製) 신
목극이라고도 하며 <격지> <나막신>이라고 불렀다.

신의 역사
신의 기원은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중국 한(漢)나라 환제(桓帝) 때 어측(於則)이 처음으로 <비>와 <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 문헌에 나타난 가장 오래 된 신은 부여의 혁답, 마한의 짚신·초교·초교답 등을 들 수 있다. 상고시대 <화>와 <이> 중 어느 것이 먼저 나타난 것인지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후당(後唐) 마고(馬稿)의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에는 조무령왕(趙武靈王)이 신목이 붙은 화를 처음으로 신었다고 했으며, 한국 상대에서는 고구려의 쌍영총 뒷방 북벽과 동벽 벽화에 화를 신은 그림과, 무용총의 벽화 무용도에 백화를 신은 여인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당시 <화>가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전(通典)》 <동이조>에 부여·마한에서 짚신을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시대 상류계급이 신었던 황혁리(黃革履), 백제에서 왕복에 신었던 오혁리(烏革履), 그리고 신라시대에 경주 식리총(飾履塚)에서 발견된 포백(布帛)과 사제(絲製)의 신, 통일신라시대 흥덕왕 때 진골에서 4두품까지 신었던 사(絲)·마(麻)·나(羅)·피(皮)로 만든 신, 고려시대 제관복(祭冠服) 가운데 있는 흑리 등은 한국의 신의 발전 과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근대 이후
1880년대 외국으로 나갔던 외교관들이 구두를 신고 들어왔고, 갑오개혁 뒤 양복이 공인되면서부터 구두를 신는 사람이 늘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양화점이 서울에 나타났다. 3·1운동이 지나고 1920년대에 와서는 구두와 양말이 유행되었으며, 시대 흐름과 함께 디자인도 달라지고 고급화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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